4월 독립운동가 海石 손정도(孫貞道)선생

  • 등록 2007.03.30 10: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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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8주년을 맞이하여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선생을 2007년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기간은 4월 1 ~ 30일 까지며 회장 손정도 등 27인의 이름으로 한인 동포와 외국인들에게 보낸 자금 지원 요청서인 대한적십자 청원서등 다수의 사진자료의 내용으로 장소는 근대민족운동관 내에 전시된다.


손정도 선생은 평안북도 강서군 증산면 출생으로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1910년 선교사로 만주 일대에 파견되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1912년 이른바 ‘105인 사건’과 가쓰라(桂太郞) 주살모의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전라남도 진도에 2년간 유배됐다.

  

1919년 4월 이동녕 등 동지 30여명과 함께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개최했다.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간사로 이광수·백남칠을 선출한 뒤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임했다. 또한 조소앙, 이시영이 초안한 10개조의 헌장과 정강을 심의 통과시킴으로써 4월 11일 임시정부가 내외에 선포됐다. 당일 선생은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됐다.

  

1920년 1월에는 김립·김철·김구·윤현진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했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여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1922년 대한적십자회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노공부장(勞工部長)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1927년에는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고자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 12월 고활신 오인화 등의 초청으로 길림에서 독립운동의 진로 문제를 협의하다가, 1931년 2월 19일 동양의원에서 지병으로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4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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