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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북한산 낙엽길을 거닐며=국립공원 관리공단 자문위원 신관섭

가을산으로의 북한산은 빼어난 산세를 더욱 돋보이게 해

지정학적 가치, 빼어난 풍광 때문에 인적이 그칠 날 없어

신라 24대 진흥왕,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처음 세웠다

 

늦가을 삭풍(朔風)인 듯한 바람 속에서 북한산 낙엽길을 걷는다. 어느덧 만추의 계절에 이러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낙엽길을 걷는 그 여유로움 또한 나만의 특권인양 흐뭇하기 그지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산은 그 맛을 달리 하지만 특히 가을 산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아름답게 치장했던 각종 꽃들과 풍성했던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나간 가을산의 골격미 랄까 육체미는 북한산의 빼어난 산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예로부터 북한산은 지정학적 가치와 그 빼어난 풍광 때문에 인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이 북한산을 오르고 또 유숙하며 많은 시와 산문을 남겼으며 군왕들의 발길 또한 잦았다.


역사 기록상 제일 먼저 북한산을 찾은 왕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이다. 북한산 비봉에 올라 순수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는 조선 후기 까지도 한양 천도와 관련하여 정도전이 세운 비석 정도로 알려져 오다가 이조 제23대 순조16년(1816년) 금석학의 대가인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가 위험을 무릅쓰고 비봉에 올라 비석에 낀 이기를 걷어내고 내용을 판독하여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비는 현재 우리나라 국보 제3호이다. 진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되어있고 모조품이 산정에 세워져 있다. 이조 제7대 세조는 대군시절에 자주 보현봉에 올라 궐내를 바라보며 야심을 불태웠다고 전한다.


역사상 북한산에 관심이 가장 많고 또 큰일을 한 왕은 이조 제19대 숙종이다. 숙종은 남한산성에 피신했다가 청에 항복하여 크나큰 치욕을 당한 증조 할아버지인 인조의 원한을 달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수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재위 37년(1711년)에 북한산성을 축조했다. 놀랍게도 북한산성은 숙종 37년 봄(4월3일)에 시작하여 가울(10월19일)까지 단 6개월 만에 끝낸 대 역사였다.


나는 북한산 등반 시 가끔 등반 동료에게 북한산성의 규모와 내력을 설명해 주고는 산성축조에 얼마나 긴 기간이 소요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대개는 한 10년, 20년 하기도 하고 짧아야 5년을 말한다. 아니다 단 6개월 만에 공사를 끝냈다. 그렇다고 대충대충한 부실공사가 아니었다. 각 공사 구간별로 그 책임자와 석공의 이름 뿐만 아니고 축성에 관련된 모든 세세한 기록이 현재 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대성문 옆의 석벽에는 그 당시의 공사 책임자와 석공의 실명이 새겨져 있다.

 

북한산성 숙종 37년 단지 6개월 축조공사로 준공한 대 역사

증조 할아버지 인조 원한 달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하기위해

일반인 중에 관심 많고 큰 업적을 남긴 사람 高僧 聖能(성능)

축조 총괄 단 시일 내 완공, 도총섭 직책시엔 北漢誌을 판각


이러한 3명의 임금 외에도 태조 이성계, 영조 이금, 정조 이산 등의 임금 들도 북한산에 관한 시를 지었으며, 일반 시인 묵객들의 작품은 실로 헤아리기 조차 힘들게 그 수가 많다. 그 중 茶山(다산) 丁若鏞(정약용)의 가을 詩(시) 한 수가 생각난다.

  

茶山 丁若鏞 (다산 정약용)

  

登 白雲臺 (등 백운대) 백운대에 올라

誰??稜考 (수착고능고) 누군가 모난 돌 다듬어  
超然有此臺 (초연유차대) 높이도 이 백운대 세웠네
白雲橫海斷 (백운횡해단) 흰 구름은 바다 위에 깔렸는데
秋色滿天來 (추색만천래) 가을빛이 하늘에 가득하다
六合團無缺 (육합단무결) 천지 동서남북은 부족함이 없으나
千年?不回 (천년분불회) 천년 세월은 가고 오지 않누나
臨風忽舒? (임풍홀서소) 바람 맞으며 돌연 휘파람 불어보니
?仰一悠哉 (조앙일유제) 천상 천하가 유유하구나
<출처: 北漢山 詩文集, 민경길 편역>


일반인 중에서 북한산에 관심이 많고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高僧(고승) 聖能(성능)이다. 성능의 호는 桂坡(계파)이며 지리산 화엄사에서 승려로 있다가 숙종때 八道都總攝(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북한산성의 축조를 총괄하여 성공적으로 단 시일 내에 완공했고, 영조 21년(1745년) 도총섭 직책을 瑞胤(서윤)에게 인계할 때에는 북한산성에 관한 일 14條(조)를 北漢誌(북한지)라 이름 붙여 판각했다.


북한지는 북한산의 역사, 지리, 산세, 봉우리 이름, 북한산성의 축조기록, 사찰, 연관된 시, 등정기록 등 북한산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북한산 백과사전이다. 북한지에는 북한산 지도도 들어 있다. 오늘날의 건설용어로 말하면 북한산성 준공기인 셈이다. 산성 입구에 고승 성능의 동상이나 기념물 하나 세웠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실로 성능은 북한산에 자신의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북한산에 얽힌 지나간 인걸들을 생각하자니 자연스레 북한산자락 구석구석에 묻혀있는 수 많은 무덤에 눈길이 간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면적은 개략 80K㎡ 정도 인데 무덤이 많이 있기로는 우리나라 국립공원 중에서 제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무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물론 북한산 동쪽 자락 수유동에 위치한 국립 4. 19 민주묘지이다. 1993년에 착공하고 1995년에 완공된 묘지로 면적 약 3만평에 4. 19때 산화한 영령들이 잠들고 있다.


4.19민주묘지, 이준 열사 묘역 등 순국선열 잠들어

연산군 묘 등 방학동 일대엔 왕족들 무덤 여럿있어

수유, 우이동 일대 광복군 17위 합동묘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유공자와 유명인사의 묘소가 위치 해

  

개인 묘역으로 가장 넓은 곳은 역시 수유동에 위치한 李儁(이준) 烈士(열사) 묘역이다. 이 묘역은 1963년에 조성되었다. 이준 열사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중에 순직한 애국지사로, 189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기관인 법관양성소가 배출한 우리나라 1호 검사이기도 하다. 지난 11월 15일 대검찰청 본관에서는 이준 열사의 흉상 제막식이 있었다.


북한산 자락 진관동 일대, 방학동 일대, 도봉동 일대에는 수 많은 궁인과 내시의 묘지가 있다. 당쟁의 진원지인 궐내에서 얼마나 많은 음모와 갈등에 시달리다가 후손도 없이 쓸쓸히 갔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든다.


북한산에는 왕족들도 여럿이 묻혀있다. 방학동 기슭에는 이조 제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소생 8남 2녀 중 막내 딸인 정의공주의 능이 있다. 양지바른 기슭에 아담하고 정갈하게 조성되어 있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그 유명한 방학동 은행나무 옆에는 사적 제362호인 이조 제10대 왕인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능이 있는데 최근에 와서야 일반에게 공개됐다.


정의공주 묘에 비하여 쓸쓸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도봉산 다락원에서 은석암에 이르는 능선길 옆에는 이조 제11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소생 1남 4녀 중 큰 딸인 의혜공주의 능이 있다. 외진 곳에 있어 찾는 이도 드물고 쓸쓸하기만 하다.


수유동, 우이동 일대에는 광복군 17위의 합동묘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유공자와 유명인사의 묘소가 있다. 이준 열사를 비롯한 손병희 선생, 신익희 선생, 조병옥 박사, 여운형 선생, 이시영 선생 등 이 일대는 독립유공자 묘역이라 할 만하다. 빨래골에는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묘소도 있다. 공초 선생답게 묘비 또한 특이하다.


백운대, 인수봉, 영봉, 염초봉 일대에는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묘비가 많이 있다. 그 중 염초봉 아래에 있는 어린 소년의 추모비가 나의 눈길을 끈다. 무엇이 급하여 그리도 빨리 갔단 말인가. 소년의 나이는 불과 열다섯이었다. 1987년의 일이니 살아있었다면 서른다섯의 중년이 되었을 텐데.


노적봉 밑에 북장대지가 있다. 원래 북한산성에는 3 곳의 장대가 있었다. 동장대는 현재 복원되어 시단봉에 서 있고, 남장대는 상원봉에 그 표지가 있으며, 북장대는 표지마저 없다. 그래서 인지 북장대 자리에는 웬 이름 모를 묘지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무슨 연유로 이 자리에 누어 계신단 말인가. 궁금하기만 하다. 후손이 발복하려고 이 자리에 모셨는가. 아니면 본인이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했단 말인가. 나는 이 묘를 얌체묘라 부르기로 하였다.


북장대지 서쪽 기슭, 보리사 위쪽에는 국내 모 재벌 C회장의 조모 묘소가 있다. 좌청룡 우백호에 배산 임수의 명당 자리에 틀림없고 그 규모 또한 왕릉에 버금 간다. 그러나 그 재벌은 부실경영으로 도산하여 타사에 회사를 넘기는 비운을 맞았다. 아마도 묘 자리 에서의 발복이 부족하였나 보다.


구파발역에서 북한산성 입구를 지나면 효자상회가 나오고 그 옆에 효자비가 있다. 효자 朴泰星 旌閭碑(박태성 정려비)이다. 정려비의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조선말기의 효자 박태성 선생은 본래 서울 효자동에 살았는데 품성이 온화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선생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묘를 이곳 신도읍 효자리에 모    시고 매일같이 새벽 일찍 일어나 묘를 참배한 후 입궐하여, 부모를 추모하는 그 정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선생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3년을 하루같이 묘소를 참배했는데, 참배 길에서 만난 호랑이도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듯 그를 등에 태워 모셨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선생의 빼어난 효행은 조정에 까지 알려져, 그의 행적을 기려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조선 고종30년(1893년, 계사) 이곳에 효자비를 세우고 포상하였다 한다. 이 비의 규모는 높이 117Cm, 폭 41Cm, 두께 12Cm 이며 비문은 회손 박윤묵이 썼다. 이곳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박태성 선생의 묘와 그의 부친의 묘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朴泰星(박태성) 일화와 연관된 이러한 漢詩(한시)도 있다.

  

萍翁 金載斗 (평옹 김재두)


題 淸潭 朴孝子 泰星 旌孝錄 後 (제 청담 박효자 태성 정효록 후)
청담동 박효자 정효비에 새긴 글을 보고

僻絶高陽北 (벽절고양북) 외딴 고양 땅 북쪽
淸潭水一涯 (청담수일애) 청담동 한 물가에
獨廬爲近墓 (독려위근묘) 효자 시묘하던 외딴 여막
願卜遂成街 (원복수성가) 터 잡다 이내 큰길 되었네
白首追喪日 (백수추상일) 백발노인 추복하던 날
蒼天孝子懷 (창천효자회) 하늘이 효자를 가엾이 여기니
山靈虎跡遠 (산령호적원) 산령도 호랑이도 멀리 가 버리고
人慟鳥鳴楷 (인통조명해) 효자가 울면 새도 따라 울었다네
<출처: 北漢山 詩文集, 민경길 편역>


정려비에서 산 기슭으로 잠시 오르면 박태성 묘, 박태성의 부친 묘 그리고 호랑이 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호랑이 묘 옆에는 거대하고 늠늠한 호랑이 석상이 세 무덤을 지키고 있다. 마치 이 호랑이가 죽어서도 박태성과의 정리를 지키려는 듯이.


호랑이는 박태성이 해치고 싶지 않은 효자인 줄 어떻게 알았으며, 왜 자기가 도와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박태성은 어쩌자고 그 무서운 호랑이 등에 겁도 없이 올라 탄 걸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과연 이 효자와 연관된 호랑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야 할지, 한낱 꾸며낸 이야기로 웃어 넘겨야 할지 혼란스러워 진다.


마치 코흘리개 시절 화롯가에서 할머니에게서 먼 옛날의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과학 문명의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이야기가 아닌가. 정려비, 정려비의 안내문, 위의 한시, 그리고 호랑이 무덤과 호랑이상은 다 거짓 이란 말인가.

 

효자비와 호랑이 무덤은 다시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한 사건으로 내 가슴을 파고 든다. 


낙엽이 흩 날리는 늦 가을 삭풍을 맞으며 북한산 각 골짜기와 능선에 산재한 수 많은 주검을 돌아 보자니 숙연한 마음에 저절로 옷깃이 여미어 지며, 李儁(이준) 烈士(열사)의 追訓(추훈) 중의 한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이 명언은 한 세기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의미는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올해는 이준 열사가 가신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오늘은 하산주도 삼가하고 근신해야 하겠다.


 

필자인 신관섭 국립공원 자문위원(61, 사진)은 72년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직에 들어 와 서울시에서 건축분야 업무를 수행해 온 순수한 건축 전문인이다. 아 울러 서울시에서 5년여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77년부터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에서 종사한 후 2004년과 2006년에 이웨스종합 건축사 사무소 부회장과 듀폰 코리아 상임고문을 현재 맡아 일해 오고 있으며, 2007년 5월부터 국립공원 자문위원 직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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