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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섭국립해양조사원장= 안용복, 홍순철 독도를 지킨 보통사람 =

국립해양조사원 소속 해양 2000호는 지난달 독도해류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일본은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파견해 우리 조사선의 퇴거를 요구하는 등 한동안 한일간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반발에도 해양조사원이 독도 해류조사를 강행한 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독도 영유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독도의 주권을 지키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못했다. 국가보다는 개인이 독도영유권확보에 큰 공헌을 한 게 사실이다.

 

안용복과 홍순칠을 비롯 이름없는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이 지금까지 독도를 지켜 왔다.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본인 또한 해양정책을 담당하는 정부관리로서 항상 부끄러움을 느낀다.

 

안용복은 조선시대 조정의 공도 정책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주민이 없던 시절 일본어민들이 출어하는 것에 분개했다. 그는 일본과 담판을 벌여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아 왔다.

 

일개 수병이던 안용복은 지난 1693년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납치됐음에도 도리어 일본태수를 설득, 에도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므로 앞으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서계를 받아온 것이다.

 

그가 받아온 서계는 우리가 일본 스스로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한 사례로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귀국한 안용복을 월경 및 관명 사칭혐의로 체포해 고문했고, 사형에 처하려 했다.

 

다행히 숙종이 귀양으로 감형, 목숨만 보전할 수 있었다. 안용복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동해는 거의 대부분 일본의 수역이 됐을 것이다. 한 사람의 선각자가 국가의 장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홍순칠은 6.25전쟁으로 정부가 독도 영유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할 때 의용대를 조직, 일본어민을 독도에서 몰아냈다. 당시 군에서 제대한 홍순칠은 사재를 털어 부산 국제시장에서 소총 등을 구입한 뒤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1953년 4월20일 그와 의용대는 독도에 상륙, 일본 어민을 몰아내고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다. 34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는 그 후 4차례 일본 경비정의 독도 접근을 격퇴시켰고, 3년8개월만인 1956년 12월 25일 대한민국 경찰에 독도수호 임무를 인계했다.

 

당시 그들은 정부의 지원없이 애국심 하나만으로 독도를 지켜냈다. 그들의  희생이 밑거름돼 지난 50여년 독도를 실질적으로 점유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독도에는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불과 한 세대 만에 선진국 문턱까지 뛰어올랐다. 이는 국민 개개인이 중동의 열사에서, 태평양의 원양어선에서, 독일의 탄광에서, 창원의 의류공장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각 분야 보통사람들이 이뤄낸 놀라운 결과다. 자신을 희생하며 독도를 지킨 안용복과 홍순칠의 후손답게 새로운 사고와 신기술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이 지구 방방곡곡을 태극기로 물결치게 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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