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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경제신문이 朴 鍾 圭위원장을 創刊대담에 선정한 이유는

  

▲박종규위원장(中)은 1991년 선주협회 해무담당 부회장으로, 당시 김부웅 선원노조위원장(右), 정웅묵 발행인(左) (당시 해사신문 이사 겸 편집부장)과 조선족선원을 양성도입하는데 따른 학교설립 등을 위해 중국연길시를 방문했다.

한국 해운歷史를 빛낸 참 경영인

해운업 勞使협력 정착시킨 장본인
종업원 지주제 도입---나눔 경영成事
바른경제동인회 설립‘원칙正道’지켜


 짙푸른 해양의 그늘을 끌어안고 사는 해양인들의 존경인물 1순위 朴 鐘圭 위원장, 그는 누구인가


35년 서울태생인 그는 1955년 서울고를 졸업하고 6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기 전, 60년12월 당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근무처로 외무부와 정부투자기업인 대한해운공사 밖에 없어,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면서 해운업과 인연을 맺는다.

국영기업체로는 유일했던 대한해운공사에서 기획파트의 가장 핵심 업무인 조선과장을 69년2월까지 맡아 오면서, 선박을 건조하는데 따른 막대한 자금조성에 역량을 쏟아, 한국해운 태동기에 10척의 신조선과 4척의 중고선을 확보한 인물이다.

  

어떤 배를 지을 것인가! 시장을 전망해야 했고, 물량에 따른 수송 배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7년의 시장을 꿰뚫어볼 줄 알아야 했다. 선박을 확보하는 것은 신조선의 경우, 당시엔 2-3년의 건조기간이 필요하여 7년 이후의 수송할 물량흐름을 파악해야 함으로 다양한 전략전술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는 64년도 이 맹기 당시 대한해운공사장에게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선박으로 컨테이너선을 강조했고, 이어 20만톤급이상의 유조선, 포항제철이 만들어 질 것에 대비하여 광탄선과 국민경제 실생활에 필요한 석유화학화물 운송선박인 캐미칼선 등의 건조선박 우선순위를 보고하여, 캐미칼선 건조를 제외한 3가지의 선종을 신조 또는 중고선 등으로 선박확보 작업을 착수한 핵심 요원이 되었다. 한국해운업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대한해운공사의 자사선 확보를,

사장 직속으로 실무차원에서 거침없이 수행해 냈다.

  

그 후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면서 69년 퇴사, 70년 캐미칼선박 운항을 전제로 하는 현재의 (주)KSS해운의 전신인 한국캐미칼해운을 설립하게 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특수선을 보유하고 있는 운항선사로 발전시키면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 유한양행과 대한해운에 이어 3번째로 나눔의 경영을 성사시킨 기업으로 발돋움토록 했다.

 

또 국내 해운경영인 가운데 첫 번째로 북한을 방문, 부산과 나진항을 잇는 컨테이너항로를 개설했고 이에 앞서 선주협회의 해무담당부회장으로 해운산업통폐합, 노사간 협력체제 정착 등에 이어 중국 연길시에 조선족선원양성학교를 설립, 부족한 부원 선원을 해결하는 등 데 앞장섰다. 1995년 3월 경영의 지휘봉을 35년 만에 전문경영인에게 넘겨주고, 회장으로 물러나면서 보다 적극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기업의 국가적 소임과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경제인들이 공유하자는 취지의 바른경제동인회를 동료기업인 100여명과 93년 설립, 97년까지 이사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활발하게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노태우 정부 때는 좌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DJ정부가 들어선 뒤 시민운동이 정권의 들러리처럼 기울기 시작, 96년부터 2년 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위원을 지내면서 노사산업평화 구축에 남다른 애정과 정열을 쏟아 왔으나, 결국은 위원회를 정부가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지론에 의해 노사정을 해체하자는 주장을 펴, 스스로 위원회를 탈퇴하고 만다.

97년 KT&G 비상임 이사와 행정개혁시민연합회 공동대표를 2004년, 2001년까지 각각 맡아 온데 이어 98년 해양수산부 행정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해양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산파역을 다해왔다.


또 2002년엔 투명성 포럼 공동대표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장직을 1년씩 맡고 2003년 해사재단이사장을 맡아 현재에 이르면서 2004년 3월과 7월엔 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여 국가발전의 걸림돌을 대거 해소하는데 큰 역할과 기능을 발휘했고 아울러 2번째 바른경제동인회 이사장을 맡아왔다.

  

현재는 지병으로 인해 한국선주협회 산하의 해사재단 이사장을 제외한 모든 직책을 그만 둔 그는 해양수산부를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10여 년 동안 한국선주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오늘의 한국해운을 발전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의 화려한 인생여정에도 92년 16회해운의 날 은탑산업훈장과 94년 제4회 산업부문 일가상에이어 95년 제4회 산업부문 좋은 한국인상을 수상하는데 그쳤다.

 

작년 8월 일산 암 센터에서 위암수술을 마치고 3개월에 한번씩 검진을 받으면서 제주도에  요양중인 그는 원칙과 정도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다.


그리고 한국 해운의 역사를 빛낸 참 해운경영인으로, 해양강국을 향한 모든 관계인들의 존경하는 인물로, 회자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빠른 쾌유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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