企劃特輯=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⑤
한국선주협회 산증인 故 이맹기 회장 누구인가
한국선주협회 산증인 故 이맹기 회장 누구인가
故 이맹기 회장(사진)은 47년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바다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5ㆍ16 군사쿠데타 후 62년 해군참모총장 겸 국가재건 최고회의 최고위원으로 재직하다 64년 예편해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외항 해운업 경영에 뛰어 들었다.
이후 해운공사가 대한선주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민영화됨에 따라 68년 해운입국의 기치 아래 대한해운을 창립, 76년 포항제철과 철광석 및 원료탄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업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그래서인지 2004년 작고한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을 박태준 포철 전회장이 두살 많아 "맹기형"으로 불렀다. 지난 2008년 12월 1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대한해운 창립 40주년 기념사 도중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2004년 작고한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을 이같이 호칭하여 이날 참석한 많은 이들로 부터 호응을 얻었다.
고 이회장(사진:2002년도 고 인의 모습)과 박 회장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도 함께 일했으나 이후엔 정치가 아닌 경제분야로 눈을 돌려 제철보국과 해운입국의 정신으로 철강업과 해운산업을 일으켰다. 이들 둘은 바늘과 실같이 사업적으로 서로에게 큰 힘이 돼 줬다. 포스코는 고로에 들어가야 할 외국의 철강 원자재 안정적인 국적 광탄선 수송선사가 필요했고, 대한해운은 이에 따라 안정적인 장기운송계약에 따른 규모와 위용을 갖출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대한해운은 국내는 물론 국제 해운시장에서 최대의 전용선대를 갖춘 국적외항해운업체로 급성장하는 기회를 맞이 했다. 고 이회장은 창업 동지들을 나이 등 순차에 의해 사장직을 맡도록하여 경영을 맡도록하고, 본인은 수년간에 걸쳐 선주협회장 등을 맡아 해양수산부를 창설토록하는가 하면 80년대 초 해운산업합리화 정책의 업체간 대 통폐합에 이어, LNG국선 외항선사 운송 시대 개막 등 각종 현안을 처리하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세계적인 한국 해운업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기도 했다.
온화하면서도 소박하면서 강직한 면모를 보였던 그는 해군 최고자리에서 예편한 후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외항해운을 헌신적인 노력으로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왔던 장본인이어서 현재까지도 고 이맹기 회장를 한국해운 역사의 산증인으로 해운인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고 이회장은 2세 경영문제만 나오면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 주면 회사도 망하고 자식도 망하게 된다면서 자식에겐 물려 줄 생각이 전혀없다고 다짐하곤 했다. 대한해운을 잘 발전시켜서 공기업으로 국가에 헌납하겟다는 것이 그의 의지였다. 그러했던 이 회장도 작고하기 몇해 전 역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동 아들인 이진방 씨를 대한해운 경영에 참여 시켰으나 결국은 최근들어 대한해운이 법정관리하에 들어 가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