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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칼럼

企劃特輯=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⑦

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⑦
한국해운歷史 빛낸 참 경영인 박종규 누구인가

생존해 있는 해운경영인 가운데 외항해운업 70년대 초장기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해양인들의 존경인물로 박종규(朴鐘圭 78 사진) 전 행정규제개혁위원장 겸 전 KSS해운 회장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35년 서울태생인 그는 1955년 서울고를 졸업하고 6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기 전, 60년 12월 당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근무처로 외무부와 정부투자기업인 대한해운공사 밖에 없어,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면서 해운업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 국영기업체로는 유일했던 대한해운공사에서 기획파트의 가장 핵심 업무인 조선과장을 69년2월까지 맡아 오면서, 선박을 건조하는데 따른 막대한 자금조성에 역량을 쏟아, 한국해운 태동기에 10척의 신조선과 4척의 중고선을 확보한 인물이다.

어떤 배를 지을 것인가! 시장을 전망해야 했고, 물량에 따른 선종은 물론, 척수와 크기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7년의 시장을 꿰뚫어볼 줄 알아야 했다.
 
선박을 확보하는 것은 신조선의 경우, 당시엔 2-3년의 건조기간이 필요하여 7년 이후의 수송할 물량흐름을 파악해야 함으로 다양한 전략전술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는 64년도 이 맹기 당시 대한해운공사장에게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선박으로 컨테이너선을 강조했고, 이어 20만톤급이상의 유조선, 포항제철이 만들어 질 것에 대비하여 광탄선과 국민경제 실생활에 필요한 석유화학화물 운송선박인 캐미칼선 등의 건조선박 우선순위를 보고하여, 캐미칼선을 제외한 3가지의 선종을 신조 또는 중고선으로 선박확보를 착수할수 있는 실무적인 핵심 요원으로 일해 왔다.

한국 해운업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대한해운공사의 자사선 확보를, 최고경영자와 호흡을 같이하며 실무차원에서 거침없이 수행해 냈던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면서 69년 퇴사, 70년 캐미칼선박 운항을 전제로 하는 현재의 (주)KSS해운의 전신인 한국캐미칼해운을 설립하게 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특수선을 보유하고 있는 운항선사로 발전시키면서, 전 직원의 종업원지주제를 창립, 유한양행과 대한해운에 이어 3번째로 나눔의 경영을 성사시킨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또 국내 해운경영인 가운데 첫 번째로 북한을 방문, 부산과 나진항을 잇는 컨테이너항로를 개설했고 이에 앞서 선주협회의 해무담당부회장으로 해운산업통폐합, 노사간 협력체제 정착 등에 이어 중국 연길시에 조선족선원양성학교를 설립, 부족한 부원 선원(상단 사진:선주협회 해무담당 부회장 시절 중국 연길시 연변선원학교를 설립하고 1기생 학생 등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박종규 회장 김부웅 위원장 필자 등 일행.)을 해결하는데도 앞장섰다. 1995년 3월 경영의 지휘봉을 25년 만에 전문경영인에게 넘겨주고, 회장직으로 물러나면서도 모든 경영권을 후임 사장에게 일임하고 보다 적극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기업의 국가적 소임과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경제인들이 공유하자는 취지의 바른경제동인회를 동료기업인 100여명과 함께 93년에 설립, 97년까지 이사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직도 맡아 시민운동에 대한 지원과 직접 간여했다.
 
때문에, 6공시절엔 좌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DJ정부가 들어선 뒤 시민운동이 정권의 들러리처럼 기울기 시작함에 이르러 시민운동에 일획을 긋는다. 96년부터 2년 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위원을 지내면서 노사산업평화 구축에 남다른 애정과 정열을 쏟아 왔으나, 결국은 노사문제에 정부가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에 의해 '노사정위원회를 해체하자'는 주장을 펴, 위원회를 떠나게 된다.(사진:선협 부회장 시절 기자회견 중인 박 회장과 필자) 
 
97년 KT&G 비상임 이사와 행정개혁시민연합회 공동대표를 2004년, 2001년까지 각각 맡아 온데 이어 98년엔 해양수산부 행정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해양수산부 규제개혁에 앞장선다. 그가 해양수산부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으니 그 해양수산부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에서 위원장 직을 수행케 된 것이다. 또 2002년엔 투명성 포럼 공동대표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장직을 역임하고,  특히 2003년 해사재단이사장을 맡아 온데 이어 또다시 2004년 3월엔 대통령산하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2년간 국가발전의 걸림돌을 대거 해소하는데 큰 역할을 한바 있다. 

그는 2006년 3월까지 2년간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수행하면서 32회의 위원회를 개최하여 매년 1000여건의 규제를 심사하여 그 중 30% 290여건에 대해 철회 또는 개선을 권고하는 등 규제의 품질 제고에 주력하는 열의를 보여, 그해 8월 규제개혁유공자 포상식에서 영예의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해양수산부를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10여 년간 한국선주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오늘의 한국해운을 발전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의 해운 발전을 위한 화려한 인생여정에에 따라 92년 16회해운의 날 은탑산업훈장과 94년 제4회 산업부문 일가상에이어 95년 제4회 산업부문 좋은 한국인상을 수상한바 있다.

그는 더불어 원칙과 정도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이면서 합리주의자다. 그리고 한국 해운의 역사를 빛낸 참 해운경영인으로, 해양강국을 향한 모든 관계인들로 부터 존경받는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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