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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朴 種圭 전 행정규제개혁위원장과의 창간대담= 정웅묵 발행인

해사경제신문은

△ 세계物流中心의 牽引車

△ 海洋强國으로의 同伴者

△ 선진大韓民國의 先驅者라는 창사정신으로, 해양분야를 통한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유도하고자 5월1일, 먼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첫 선을 보이게 됐습니다.


이와 관련, 국내 해양업계의 어른이고 원로인 朴 鍾 圭 전 행정규제개혁 위원장님(사진:박위원장을 창간 특별대담에 모시게 된 배경은-참조)과 鄭 雄 默 해사경제신문 발행인이 지난4월12일 창간 특별대담을 가졌습니다.  (편 집 자 주)

 

 

신혼여행을 광탄선 건조위해 포항 백사장으로

7년 후 수송물량 分析 등 건조자금 조성에 주력

중고선 4척, 신조선 10척 해운공사 재직시 도입

  

 

 ☞. 위원장님은 과거 대한해운공사에서 근무하시는 등 한국해운발전에 있어 산증인이시며, 그 발전의 산파역 역할을 해 오신 장본인으로, 해운 발전과 관련하여 잊지 못할 일들을 회고해 주십시오.

 

  - 61년 대학을 졸업(서울대 정치학과)하기 전, 대한해운공사에 시험을 보아 60년12월부터 해운에 인연을 맺었습니다. 외무부외에 외국 주재원을 둔 기관은 당시엔 해운공사 하나뿐이어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입사 동기생으로는 고인이 되신 김영선 범양상선전무와 이름이 같은 박 종규 한국선무 고문 등 모두 12명이었습니다.

  

▲ 해사행정일원화를 진두지휘했던 박위원장은 "조선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조선행정을 해양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세 연배이신 박 종규 고문은 같은 날 같은 사무실에 출근하여 오늘 날까지 해운 계에 종사한 개인적으로는 특수한 우정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출근 첫날부터 여직원들이 전화 받는데 혼선이 생겨, 구별하기위하여 나를 保 朴(보험계 박종규)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르게 되었고, 여직원부터 사장님까지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박종규씨는 이름 그대로를 불러주어, 나만 제 이름을 잃어버린 해공시절의 10년 이었습니다.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엔 몇몇 선박회사가 있었으나 해운공사가 한국 선복총량의 90%를 보유, 수출입 물량을 전담하다 싶이 했으며 조선과장으로 일하는 동안, 중고선 4척과 신조선 10척 등 모두 14척의 선박을 도입한바 있습니다. 인문과 출신인 제가 조선과장이 된 것은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라는 것이 아니라, 선박건조 자금조달과 도입선박의 선종결정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자금조달을 위해서는 외자도입과 정부예산을 따야했고, 선종결정을 위해서는 건조기간 3년을 합하여 5년부터 10년간의 미래시장예측작업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도입해야 할 선종으로 회사 이사회에 올린 것은 컨테이너선을 비롯하여 VLCC, 포항제철 설립에 따른 광탄선, 그리고 석유화학운반선의 4가지 선종이었는데 이사회에서 4가지 선종 가운데, 석유화학운반선은 500톤 미만의 소형선이라 대한해운공사 같은 큰 회사에서 할 일이 아니라고 하여 기각했습니다.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 된 후 제가 퇴사하면서 그 당시 노트에 기록해 둔 석유화학운반선 확보방안을 토대로 현재의 KSS해운을 70년에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될 줄은 나 자신도 몰랐습니다.

 

▲12년前 가장 왕성하게 일 했던 박위원장은 원칙과 정도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이고 합리주의자였다.

63년도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여행 중 포항에 가서 그곳 백사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제철공장부지 예정지라는 그곳 계획수심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과장이라는 자리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해야 하는 자리였고, 극비로 추진하는 일도 많아 거의 사장 직속기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맹기사장님의 총애도 아울러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비료공장 원료수송선 도입입찰을 당시 교통부 해운국에서 했는데, 인광석 원료생산지인 미국 탐파항의 수심이 선박크기를 좌우했습니다. 항만정보지에 나와 있는 수심으로 계산하면 2만5천톤급 3척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있는 주재원을 현지조사를 시켰더니 수심이 더 깊다는 것이 확인되어 극비리에 4만톤급 2척으로 바꾸었습니다. 전자보다 후자의 운송원가가 싼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저는 4만톤급 2척 계획을 숨기고 입찰 하루전날 2만5천톤급 3척 계획으로 이사회에 올려 승인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 하면, 당시 해운공사는 국영기업이었고, 내부에는 경쟁사에 정보를 줄만한 인사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러 허위정보가 새 나가도록하는 작전을 한 것입니다. 이사회까지도 속인 것입니다. 사장님에게도 이사회 직후에 알렸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다음날 경쟁회사는 내가 흘린 3척의 계획서를 기초로 응찰하였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최저입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경제기획원 부총리인 장 기영씨의 압력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실무자인 저로서는 아쉬운 추억의 하나지요.

  

강력한 ‘정부의 해운산업 통폐합’에 애로 막심
15년전 외항해운 勞使협력 기틀이 성과 거둬
조선행정 통합으로 양 업계 상호 발전 구축을

  

 

  ☞. 현재의 KSS해운을 창업하시고, 오랜 기간 동안 선주협회의 부회장직을 수행해 오셨습니다.그 기간동안 무엇보다 해양수산부 창설 등, 한국 해운업의 인식제고에 따른 저변확대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오신 것입니다. 한국선주협회 부회장으로서의 과거 활동과 해사행정일원화 등을 어떻게 추진하셨고 그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 무엇보다 한국해운사의 큰 획을 긋는 일은 외항 해운업체 전체를 대상으로 한 83년도의 해운산업통폐합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통폐합을 반대하신 분은 이 맹기회장님이었습니다. 건전한 회사까지 부실한 회사와 통합한다는 것은 외항해운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은행을 살리기 위한 조치임으로 반대하신 것이지요. 이 회장님의 뜻은 선박회사가 경영을 잘못하여 부도날 경우, 회사는 없어지더라도 선박은 남게 될 것이고, 은행이 공매처분하면 그 당시 時價로 능력 있는 회사가 인수하여 자연스럽게 통폐합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야 해운계 전체의 부담이 적다는 논지였습니다.

 

그분 말씀이 지금 생각해 봐도 백번 옳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해항청이 먼저 손을 내미는 바람에 은행은 이자에 대한 손해는 있었지만 원금은 전액 장기회수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불량채권을 우량기업이 떠안게 하는 방안이 정부의 강권에 의해 단행 된 것입니다. 해운통폐합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해운업계는 그 후 형극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KSS해운은 지금도 남의 빚을 갚고 있습니다. 정부의 요청에 의해 당시 저는 이회장님의 뜻을 굽히도록 설득하는 일에 고충이 많았습니다. 해운통폐합의 목적은 은행과 범양상선 살리기였는데 은행은 살고, 범양은 사주의 불행과 더불어 장기간 입원하는 결과만 초래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선원노동조합과의 협력문제였습니다.


80년대 말 민주화 물결과 더불어, 선원사고가 나면 가족들이 회사에 몰려와 일을 할 수 없도록 기물을 파손하는 등 난폭하기 이루 말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사건이 날 때마다 보상금을 올려 받기 위해 날이 갈수록 더욱 난폭해 지고, 전문 조직깡패까지 개입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상태로 가서는 해운업을 영위하지 못할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따라서 숙고 끝에 사망사고 보상을 노동조합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흡족한 안을 제시하여 선주협회가 노동조합으로부터 신뢰를 얻은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선원법도 노동조합의 숙원인 평균임금을 수용하여 노동조합과 선주협회간의 불신은 사라지고 신뢰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물론 선주들의 동의를 얻는데 어려운 점도 많았으나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설득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러한 토대가 선원부족에 대비한 외국인선원 승선문제에 노조가 동의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박 위원장(右)은 15년 전(1991년),김 부웅위원장(中) 등 과 중국 연길시에서 김 동기 연변자치주 상임위원 등 중국 측 노조 관계자들과 만나 조선족 선원양성을 협의했다.

당시 리더십이 강했던 金 富 雄 위원장 덕분에, 노사 신뢰관계는 더욱 축적됐고 개인적으로도 인간적인 신뢰관계마저 쌓였습니다. 그로 인해 외항해운업계는 현재까지 그 흔한 파업 한번 없이, 오늘의 한국해운의 위상을 확보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해사행정을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지만, 사실 숨은 공로자는 김 재철 전 무역협회 회장님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분은 발도 넓고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해양부 창설의 최고의 목적은 해운투자의 효율성입니다. 5공 시절에는 物價 잡는다고 부두에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항만투자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6공에 들어와 청와대에서 항만투자를 주도하게 되어 오늘날 그래도 광양만이다 부산 신항이다 하는 것이 태어 난 것입니다. 과거 해운항만청시절의 힘으로는 투자자금을 지속적으로 조성하기 어려웠습니다. 바다의 힘을 집결시켜 바다관련투자를 늘여야하는 당위성이 바로 해양수산부를 탄생시킨 제일의 목적이지요.


또 하나의 목적은 업종은 다르지만 해운과 수산의 경우, 유류 오염사고가 나게 될 경우, 해운은 가해자가 되고 수산은 피해자가 됩니다. 이런 해양오염사고가 발생하면 해경에서 사고를 수습해줘야 하는데, 내무부 산하 해경은 밀수 등 해상범법자 검출이 제1일 업무이지, 해상안전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해상교통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나 사고가 날 때 마다 사정을 하여 사고수습을 해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이에 농림부나 해운항만청은 이런 상황 하에서는 해상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해경을 해양수산부 소속 기관으로 하고 수산청과 해운항만청을 통합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해운과 수산만을 통합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당시엔 유류오염사고가 잇달아 발생하여 사회문제로 번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호남탱커라는 회사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바 있습니다. 이것이 해사행정일원화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결국은 해상의 안전을 전제로 해경이 해양부 산하기관으로 오게 됐으나 상공부의 조선행정은 통합되질 못했습니다. 조선과 해운은 항상 6개월 정도 차이의 경기변동 흐름이 있음으로, 상호발전을 위해 정보교환이 요구되고, 특히 조선 산업을 위해서도 기계공업적인 차원의 행정이 아닌 양 업계발전을 위한 행정으로 조선과를 통합했어야 했습니다. 상공부의 반대로 성사되질 못했으나, 이로 인한 손실은 앞으로 조선업의 몫이 될 것이며,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북한에 10년 전 첫방문 부산-나진항로 개설
남북화해 정착 후 국적선 투입 운항해야 돼
북측 항에 서둘러 국적선 투입할 이유 없다

 

 

  ☞. 해운경영인 가운데 최초로 북한을 방문, 부산-나진 간 컨테이너항로를 개설한 것은 물론, 중국과의 수교 직후에 중국연길지역의 조선족 선원학교를 설립하시는 등 왕성한 대외활동을 해 오셨는데, 당시 어려웠던 일들은 무엇이 었는가요.

 

▲남측 해운경영인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여 부산, 나진항 컨테이너 항로개설 등 현재의 남북해운협력의 기틀을 마련했다.(1991년 북한 남양을 뒤로하고 中 도문시 도문교 앞에서---)

 - 북한에 다녀 온지 벌써 10여년이 넘었습니다.
나의 소신은 좋은 항구가 있고 좋은 바다가 있으면 배가 못 다닐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민족과 같은 나라인데 육로는 막혀 있더라도, 바다 길은 막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닷길은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적대관계의 국가나 미수교국도 국기를 단 민간선박이 먼저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북 간의 문제도 태극기를 단 선박이 왔다 갔다 해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지요. 그것이 첫 번째 방북목적이고 두 번째는 중국 연길에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 교역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단동이나 대련 등 먼 운송구간을 이용해서는 경쟁력이 없었던 것으로, 더 신속하고 용이한 북한 나진항을 연결해 주어야겠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연길의 산업은 발전을 못하고 있고, 늘어난 것은 술집과 노래방뿐입니다. 화물이 늘지 않은 상태로 오히려 줄어 들 때도 있어, 이런 상태에선 희망이 있는 항로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북한이 현재는 남북해운합의에 따라 법률적으로 태극기를 단 선박을 오가도록 했는데, 그 당시엔 그것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북측과 난상 협의 끝에 계약서상에는 국기를 달아도 좋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당분간 달지 말아달라고 했으며 현재도 제3국적선을 투입, 운항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선박을 운항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북측의 요청에서가 아니라, 우리 선원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입니다. 남북 간 운항선박에, 언젠가는 북한의 밀입국자가 숨어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합니다.

 

70년대 말 일본 냉동선 후지마루가 그런 경우를 당했지요. 당시 북한은 남포항에 다시 들어온 선장과 기관장을 구속하여 자국인을 납치했다는 죄를 씌워 종신형을 선고했습니다. 7년이 지난 후 일본 거물급 정치인인 가네마루(金丸 信)씨가 북한에 가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업자체를 못하게 됩니다. 납북자문제도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를 믿고 국적선과 우리 선원들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회사가 자위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국적선 투입을 못하는 사정을 해양수산부에서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해양부는 한국적 선박을 투입하라는 이론적이고 비현실적인 입장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正道, 투명경영 위해 바른 경제동인회 설립
勞使문제에 정부간여 시 갈등만 증폭 된다
기업주 소유의식, 관리의식으로 전환되기를

 

  

  ☞. 어려운 시기에 바른 경제동인회를 창설하시는 등 그간 사회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정도와 정의에 입각한 경제활동을 유도하셨는데, 당시 이 모임을 만들게 된 배경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요.

 

 - 87년도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그동안 참아 왔던 노동운동이 봇물처럼 일시에 터지게 되면서, 녹십자 병원이 문을 닫는 등 많은 노동사건이 연속하여 발생했지요. 우리는 50년대 일본처럼 노동분쟁을 치러야 할 시기에 6.25를 겪었습니다. 일본은 45년 이후 60년까지 15년간 노동분쟁에 시달렸지요.

  

▲ 이번 대담에서 "우리나라 기업주는 소유의식에서 관리의식으로 하루 빨리 전환하고, 강하게 자리 잡고있는 혈연주의 경영 배제를" 촉구했다.(12년전 제4회 일가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 장면)

우리는 산업사회가 아닌 상황에서 6.25가 발생하는 바람에, 노동자가 적었고, 박 정희대통령 시절, 산업사회에 들어가서는 단축성장에 장애가 될 우려에서  노동조합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87년 들어 88올림픽을 앞두고 한꺼번에 엉망으로 터지게 된 것입니다. 학생데모, 노동운동이 일시에 터졌는데 중국도 2008년 올림픽을 두고 걱정이 될 텐데 잘 대처할 것으로 봅니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올림픽 중에는 조용했지만, 그 후에는 또다시 불기 시작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고, 일본이 먼저 겪은 분쟁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겠다고 저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도서관을 찾아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일본은 좌익노동운동에 합리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46년도에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모여‘경제동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디다. 노동자를 파트너십으로 수용하는 취지로 설립된 이 단체의 활동과 노사분쟁 과정을 자세히 읽어보고‘우리나라도 이런 경제단체가 필요 하구나’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 바른 경제동인회’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비자금을 조성하지 말고, 뒷거래하지 말며 정도 경영을 하고 노사관계는 파트너 쉽으로 가자는 주장을 전제로 하여 설립, 많은 기업인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모임으로 노동분쟁이 달라진 것도 없었고, 도리어 정부가 노동분쟁에 개입하여 더 악화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정부는 심판 역할을 해야 하는데 DJ정권은 노사정위원회를 만들면서 운동선수로 직접 간여했습니다.

  

기업주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게 된 것이지요. 당시 제가 노사정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회의 때마다, 해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덕분에 위원회에 미움을 받았고 결국 위원회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정도 경영의 기치를 내건 효과가 자금에 와서 볼 때, 과연 많았는가를 뒤돌아보면 큰 효과는 없었다고 봅니다. 결정적으로는 IMF사태가 투명경영을 가져왔습니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정도경영을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사회가 부패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 있고, 기업주의 사고가 소유권의식이 너무 강한 탓입니다.

  

소유권의식을 관리의식으로 하루속히 전환돼야 하며, 특히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혈연주의 경영을 배제해야 합니다. 혈연주의가 너무 강하면 경영의 합리성을 찾지 못하며 결국 21세기 올 코트 세계 경쟁에서 뒤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기업인들의 의식전환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바른 경제동인회도 펩시콜라 사장을 지냈던 50대의 김 동수 씨가 새로운 이사장으로 취임했음으로 활동반경과 진로 등을 바뀌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투명경영을 원칙으로 하다 보니, 외국인의 M&A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고, 또 쉽게 접근을 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 경영자체는 좋지만 경영권을 방어하지 못할 만큼의 상황이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형태이든 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합니다.

  

최근 국내 외항해운업체의 경우도 외국회사가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경영권 방어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대주주의 지분이 적어‘늑대 밥’이 될 수도 있는, 이율배반적인 상황도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른 경제동인회가 그런 문제도 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경제부총리가 이 문제에 대해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고 말해 걱정입니다.

  

盧 정부, 역대 정권 못 푼 상용화문제 해결
규제개혁에 安全분야는 예외 적용돼야 한다
작은 정부지향하고, 정부투자기관 민영화를

 

  

  ☞. 지난 3월24일 행정규제개혁 위원장직의 2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셨는데, 그간 어떤 일들을 하셨고, 정부에 대한 당부사항과 더불어 해양부가 올해 창설 10주년을 맞았는데 따른, 앞으로 발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그동안 해운업의 경우 많은 규제들을 풀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제일 큰 것은 역대정권이 해결 못한, 항운노조 상용화문제입니다.

  


위원장에 부임 후 가장 핵심적인 것이 항운노조 상용화문제였습니다. 규제개혁위원회 산하에 있는 기획단에서 맡아 처리하는데 문제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조용한 처리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운이 따라주어 노조간부들이 구속되는 등 여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 틈에 해양부와 노동부가 관련법을 개정해 상용화를 달성한 것입니다. 역대 정권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행정규제개혁 위원장 시절, "규제 가운데 시장경제에 절대 맡겨서는 안되는 것이 安全을 전제로 하는것"이라며, 이에 따라 기획단의 검토안건인 외항선의 도선사 계약제 도입을 설득에 의해 막은 바 있었다고 말했다.


법인세(톤 세)문제 해결도 노무현 정권의 업적중 하나입니다. 해양부가 다른 부처에 비해 많은 규제를 풀었는데 도 작년에 또 추가로 행정규제를 많이 풀었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전 국민에 대하여 잘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즉답하기에는 의문이 많습니다마는 해운 계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일을 해준 고마운 정부임엔 틀림없습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해야지요.
 
기획단의 검토사항에 현행 도선사 순번제를 계약제로 전환하여 자유경쟁체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규제 가운데 시장경제에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안전문제입니다. 도선사는 무엇보다 선박의 안전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계약제로 할 경우, 사용자는 싸고 신속한 도선을 원합니다. 그러면 안전도선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선사는 도선에 역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선사와의 계약에 치중하게 되고, 이어 로비에 열중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특히 협수로인 인천항의 경우 만조 때가 안 되면 선박도선이 어려운데, 만약 협수로에서 도선 중 문제가 생기면 인천항의 입출항 해로는 봉쇄되고 그로인해 엄청난 피해는 국민경제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나도 사업가이지만 항만의 안전이 기업의 경제적 작은 이점보다 더 중요하다”고 우리기획단 직원들에게 역설하였더니 “우리가 민간인이 되었고, 위원장님은 공무원이 되었네요!”하면서 박장대소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저의 주장에 의해 도선사제도는 현행 그대로 존치할 것을 결정했지요.

 

이때 기획단 공무원에게는 밝히지 않은 내용이 있습니다. 현재 해운업계는 선원부족이 가장 큰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보통선원이 부족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고 도선사제도가 흔들리면 선장 부족사태마저 오게 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선장의 희망은 도선사가 되는 것인데, 도선사 제도가 흔들릴 경우, 선장이 되려는 해기사도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에 선장이 없는 해운 발전의 愚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까지 공직자에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 "현재 많은 규제가 풀어 진 것을 보면, 대통령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현 정부는 작은 정부에 대해 언급이 없음으로 계속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사진:15년 전 모습)

그 밖에, 예선의 안전과 예선업계의 과당경쟁을 방지하기위하여 예선도입 시 12년의 선령제한 조항을 국 내항간 이전 시에도 적용하도록 하였습니다. 부산과 인천에 사용하던 헌배를 다른 항구에 이적하여 사용하려는 짓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작은 항구에는 헌배의 쓰레기장이 됩니다.
 

해양부에 2중 조직이 많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비단 해양수산부의 문제만이 아니고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로 봅니다. 결국은 큰 정부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처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옷을 크게 만들어 입을 것이냐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이지요. 사람을 줄일 생각은 안하고 어떻게 하면 사람을 늘릴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 통치자의 의지로 줄이라고 하지 않을 경우엔

가만히 있어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DJ정부가 모든 규제를 무조건 반으로 줄이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중요한 것은 두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숫자만 맞추어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그런 일이라도 했기에 현재 많은 규제가 줄어든 것을 볼 때, 대통령이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줄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 핑계가 나올 텐데, 현 정부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적 없으니 계속 커지고 있는 것이지요.

 

기업체의 경우도, 어떻게 자회사를 만들어 중역들을 앉히느냐에 신경 쓰는 것처럼, 정부도 자리를 보전해 주는 쪽에 신경을 쓸 뿐이지, 국민이 얼마나 더 세금을 내는 가에는 소홀할 뿐입니다. 오직하면 작년 한해에 무려 6000억원의 예산이 남아돌아가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들이지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의지가 부족하여 이런 문제가 생기므로 비슷한 기능을 통폐합하고, 정부 투자기관을 민영화하여 정부가 하는 일을 축소해야만 합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서 인기가 있는 것이 바로 이 정책 때문입니다.

 

해운경영인 감각적으로 상황대처 역량필요
 先見之明과 미래를 분석하는 능력도

모든 사안들에 감(感)으로 일 할 수 있어야

  

  ☞. 해양강국으로 가는 핵심역할을 외항해운업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 해운산업 발전에 따른 고견을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 사장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회장으로 물러나 사회운동을 한지, 어느 덧 11년이 됐습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입장이 못 되지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는 외국과의 업무가 많은 산업이어서 국제인 양성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해운인은 국제인으로 훈련하여 소양을 갖추고, 해운업은 도박성이 강한 점이 없지 않기에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잘 하는 전문가처럼, 순발력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선경지명, 즉 여러 가지 많은 지식을 지녀야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박은 선가상환이 종료되는 시점인, 건조 후 10년까지 이익이 나야만 됩니다. 그 후엔 운임이 좀 떨어져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년간 예측을 하여 선박투자를 해야 하는 경영자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사건들까지, 지켜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일예로 과거 파나마 운하가 한발로 인해 수심이 떨어져, 운임이 급등한 적이 있습니다. 선박에 화물을 적게 선적해야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지요.

  


과거엔 전쟁이 나면 해운경가 좋았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6일 전쟁으로 오일쇼크 발생하고 엄청난 운임변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유조선운임은 폭락하고, 벌크운임은 급등하는 것을 볼 때, 정치 경제는 물론 기후변화, 환율까지의 지식을 고루 갖추어 현재는 물론, 미래 이익을 창출해 내는 경영자가 양성되어야 합니다.

 

변화에 대해 본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만 진정한 해운경영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운경영자는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하여 여러 가지를 갖추어 모든 사안에 대해 감(感)으로 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주식시장에서 주식 잘하는 전문가처럼 해운 경영인은 순발력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함"을 강조했다.

(15년전 백두산 등정서 환율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저는 사장시절, 환율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선박건조계약을 하고 나면 언제 환율을 픽스(fix)하느냐하는 문제로 늘 고민했습니다. 잘못하면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고, 잘하면 船價를 크게 낮출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91년도 당신과 같이 백두산에 같이 올라갔을 때(사진)인데, 천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환율이 좋을 텐데 하산하면 달러를 예약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동경으로 바로 날아가 달러로 Fix했더니 득을 본적이 있습니다.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잘 하는 전문가처럼, 순발력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주도 중문서 스트레스 안 받고 요양 중
독자가 열어보면, 이익 나는 新聞 만들길

유능한 인력 수급 공급, 복덕방 기능발휘

 

 

 ☞. 최근의 위원장님에 대한 근황과 海事經濟新聞 창간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길 바랍니다.

 

 - 수술 후 죽 먹는 단계를 지나 현재는 밥을 먹는데 가끔 고장이 나 병원에 가야함으로 병원 가까운데 있어야 합니다. 병을 늦게 발견하여 암 말기인 줄은 몰랐지요. 작년 8월 일산 암 센터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제주에 내려와 자연치유법으로 면역증강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매일 운동하고 온천욕으로 혈액순환을 돕고, 잠 잘자고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터뷰요청 자체가 스트레스입니다 만 유일한 해사경제 인터넷신문이 등장하는데, 해운인으로서 응하지 않을 수 없지요. 서울 사무실도 정리하고 3개월에 한 번씩 병원가기 위해 서울에 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조심하고 있으나 체중은 약20%정도 빠졌습니다. 이제는 일은 그만하고 휴식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해사경제신문이 창간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디지털시대를 맞아 각종 유익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하여, 독자들이 업무하기 전에 열어보는 신문이 되도록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이에 경제인들이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로‘열어보면 이익이 나고, 열어보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될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제운영지표 등을 반영하면 더욱 좋을 것이고 과도한 요금 부담 없이 열어 볼 수 있도록 운영하길 바라며 선박매매 동향 등 외국의 뉴스를  제공하고, 무역회사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선원구직 구인광고 등도 취급하여 유능한 인력 수급공급의 복덕방 역할도 하기 바랍니다.

 

  

창간 대담을 마치고- - -

  

박 종규 전 행정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님은 28년간 취재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은 해외 수행취재를 허락하는 등 외항해운 등 업계의 현안취재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응해주셨던, 한 분으로써 그간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마음속에 간직해 왔다.

  

▲ 김 부웅위원장과 노사 협력을 국축한데 이어 부족했던 원직급 부원선원들을 도입키로 한 박 위원장은 중국 동포인 조선족을 대상으로, 1991년 선원학교를 연길시에 설립했다.(당시 전 용만이사장, 김 용호교장과 함께)

15년 전 중국 조선족 선원을 도입하기 위해 당시 김 부웅 선원노조 위원장님과 당시 박 종규선주협회 부회장님을 동행(사진) 취재했던 일의 기억이 가장 생생하게 손꼽히고 있다.


외항해운업 발전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박 위원장님은 故 李 맹기 대한해운 회장님께서 오랜 기간 선주협회 회장을 맡는 동안 해무담당 부회장으로, 외항해운업계의 궂은 현안들을 탁월한 지혜와 수완으로 풀어냈던 '해운업계의 정치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치를 했으면 더 잘하셨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4월11일 오후2시30분 대담을 앞두고 병원에 갑작이 가시는 관계로 하루 연기됐는데, 과연 괜찮으신지 궁금한 마음이 앞섰다.

 

12일 같은 시간 관훈빌딩 11층 바른 경제동인회 이사장 실에 도착, 5시30분 경 3시간 여 대담을 마쳤다. 2006년 3월말로 모든 직책을 그만 두시고, 해사재단 이사장 하나만의 유지하고 계시는 박 위원장님은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대담을 통한 언변은, 과거 그대로의 열정이 가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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