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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①威東航運 20주년 설립당시 회고한다

한중수교의 威東航運 20주년을 맞이하다


우리나라 한중간의 최초 카페리선사인 위동항운유한공사(威東航運有航公司)가 지난 9월 15일로 인천항에서 중국 위해항으로 첫 출항한지 20주년을 맞이했다.


위동항운은 현재 중국항로를 오가는 여타 카페리선사의 선두선사로 그간 한중양국 정부의 카페리운항 정책 수립에 있어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양국간 수교를 앞당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큰 임무를 맡아 수행하기도 했다. 해사경제신문은 특별기획을 마련 위동항운 20주년 설립 과정과 한중항로 20주년 한중해운포럼의 주요 내요에 이어 뉴 골든브릿지 2, 5호의 운항실태 등을 ①~⑦에 걸쳐 집중 보도한다.(편집자 주)

 


1990년 한중간 미수교 상황서 출범

91년 수교에 결정적인 民역할 수행

양국간 항로 초기 인적물적 등 열악 

 

위동항운 설립과 당시 상황= 노태우 정부 시절 한중양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미수교국 상황에서 상호 협력기반을 전제로, 중국측의 요청에 의해 한중간 카페리를 취항시킨다는데 뜻을 같이 하여 인천항과 중국 위해항을 연결하기로 하고 최초의 미수교국인 중국과 합작으로 위동항운이 출범하게 된다.


중국 중앙벙부기관의 산하기관인 중국대외무역운수공사(시노트란스)와 한국측 SK해운(당시 유공해운)등 3사가 50대50의 자본비율로 설립된 위동항운은 중국 위해에 본사를 두고 이같은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출범했다. 당시엔 과연 미수교국인 상황에서 한중간에 카페리항로가 제대로 발전할 수있을지에 의아심을 갖게 된 것이 대다수 관계인들의 반응이었다.


무엇보다 미수교인 중국에 오가는 여객과 운송화물이 운항원가를 카버할 수 있을지에 모두가 의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리항로 개설보다 2년 전 한중간에 개설된 최초의 컨테이너선사인 시노트란스와 동남아해운의 합작선사인 장금상선도 당시엔 컨 화물 유치에 많은 애로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주변 상황하에 당시 양국 정부간 정치적인 협력에 의해 운영되는 위동항운의 초기 항로는 험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대 주주인 SK해운은 굴지의 외항해운업체로서 초기 당시의 운항 손실 등을 감당한다는 입장에 의해 과감한 항로 개설에 앞장섰다. 일본으로 부터 도입한 골든브리지를 개조한 후 1990년 9월 15일 인천항에서 첫 취항식을 개최 익일 16일 위해항로에 도착하면서 미수교국인 한중 항로엔 카페리가 개설되는 역사를 이뤄냈다.
 

당시 우리나라 인천항에서의 항로 개설시엔 그 중요성을 감안해 당시 김영삼 민정당 최고위원을 비롯해 소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청문회 스타인 이인제 강삼제 국회의원 등 다수의 정치인을 비롯해 안공혁 해운항만청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김 최고위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정치인들이 취항식 행사에 이어 주주사 대표, 관계사 대표 등에 이어 기자와 함께 첫 시승에 동승한 바 있다.

 

(사진:2007년 8월 이종순(李鐘洵) 전 위동항운유한공사 사장이 청도시가 주관하여 개최한 최근 세미나에서 17년간의 한중카페리 운항사업의 경영을 토대로 한 청도항의 동북아 물류중심화 제언이라는 제목의 내용을 발표하여 현지 각계의 관심을 불렀다)


9월15일 골든브릿지는 저녁시간때 인천항을  출항하여 처녀항해인 위해항을 향에 출항했다. 정연세 전 해운항만청장과 이종순(사진) 위동항운 초대 대표이사 사장을 비롯해 국내 주주사 대표와 취항식에 참석한 정치인 주요 관련선사 대표 등 모두 100여명의 초청인사는 미수교국을 잇는 카페리에 첫 시승한다는 남다른 의무 등에 만감이 교차했다.


첫 항로 답사의 이모저모= 15일 저녁시간에 인천항을 출항한 골든브릿지호는 16일 아침시간대에 정확하게 임시로 마련된 위해항 터미널에 도착했다. 위해항 입항전 먼 곳에서 보이는 위해항은 한마디로 인천항보다 많이 낙후된 모습이었다. 위해항에 도착 당시 위행항엔 우리 일행들을 환영하기 위해 초 중고 대학생들은 물론 수많은 시민들로 구성된 환영 인파들로 대단했다.


위해시는 당시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연태시의 위성도시 수준으로 호텔이 하나밖에 없으며 주변 경제 환경은 양식 등 어업을 주로 하는 소도시에 불과했다. 위해시 유일한 호텔인 위하이 호텔에서 우리 일행은 2박3일 일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인천항으로 귀항하는 일정이었다. 중국에 도착한 일행은 현지에서 외국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화폐로 교환해야 했다.


돌아오는 위해항에서는 중국측 승객은 대다수가 우리 동포들인 조선족이었다. 그리고 한국측 친지들을 방문을 목적으로 한 승객들로 구성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이 분들 역시 중국인들로 달러 등 화폐를 바꿀수 없어 중국돈을 가지고 승선해야 했다. 우리 일행들은 이를 감안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돈을 모아 그날 저녁과 익일 아침 등을 대접했던 기억이 20년이 지난 현재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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