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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圭 바른경제동인회 회장 2015夏季특별대담

                      朴鍾圭 바른경제동인회 회장 2015夏季특별대담 정웅묵 해사경제신문 발행인
 
                      이제 우리나라 기업체가 이익공유제를 실현해야 한다
                     국적외항해운업은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경영을 해야
                     무역 성장 발전위해서라도 혁신적인 컨운항 정책긴요
                      18년전 창립한 바른경제동인회 회장직 맡아 노력 중
 
기자가 2006년 4월12일 박종규(朴鍾圭 81 사진)회장님을 뵌 후 9년여 만에 지난 8월 25일 뵙게 됐다. 9년전 해사경제신문 창간 당시 첫번째 특별대담으로 박 회장님을 인터뷰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뵙게 된 것은 2005년 위암 말기 수술 후 항암치료를 제치고, 제주도 중문 한라산 중턱에서 자연치료법을 수행하고 계시고 있는 터라 일체의 스트레스를 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창간 특별대담 당시 기자를 만나야 하는 자체가 스트레스르를 주는 일이라고 언급했던 기억이 생생한지라 그간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가끔 안부 인사 전화를 드리곤 하면 반갑게 받아 주시곤 했다. 이에 이번 제주도 크루즈포럼 행사 취재차 가는 길에는 뵙기로 작정하고 전화를 드린 결과, 성사됐다.

대한해운공사를 첫 입사하여 순수해운인의 길을 걸어 왔던 박 회장님은 현 KSS해운의 전신인 한국특수선을 창업한 후 한국선주협회 부회장 등 사회 각종 주요 직책을 맡은데 이어 바른경제동인을 설립해 회장을 엮임한 후 올해 바른경제 동인회 회장직을 다시 수락해 맡고 있다.

아울러 2006년엔 2년간에 걸쳐 행정규제개혁위원장을 맡았다. 이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바 있다. 현재도 박 회장님은 우리나라 기업중에서 처음으로 이익배당제를 창업회사인 KSS해운에 도입해 사주조합을 알차게 발전시키고 있는 등 이 시대를 사는 해운경영인의 귀감으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故이 맹기 회장님에 이어 해양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으로 평가되고 있는 평생 해양인이다. 박 회장님의 관심사에 대해 제주도 서귀포시 바이오 토피아 레스트랑에서 이날 오후 대담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날 박 회장님께서 언급한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편집자 주)

◇ 우리나라 해운업의 발전책은 무엇인가

작금의 외항해운업은 불황이 점점 길어져 많은 선사가 부담을 안고 있는 실정입니다. 해운업은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해야 합니다.

더욱 해운업 특성과 속성에 있어 불황은 길고 호황은 짧다는 말이 있습니다. 해운업의 호황은 길어야 평균 1.5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최근엔 4년이라는 호황이 찾아 왔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선사들이 새롭게 창업했습니다. 그 후 현재 해운업은 불황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 걱정입니다.

무엇보다 해운업 경영인은 나무장사를 하는 사람처럼 나무를 잘 심는 과정부터 필요합니다. 나무장사는 몇년 길게 보고 품종을 선택하여 잘 심고 가다 듣어 상품가치를 인정받아 장사를 하는 점을 배워 가야합니다.

해운업을 오래한 경영인은 그간 여러가지 양상으로 인한 불경기를 많이 겪어 왔기에 사전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나, 새롭게 해운업 경영을 시작한 경영인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운업은 모든 분야를 종합하여 과학적인 판단과 격식등을 두루 갖춘 합리적인 경영판단을 하는 사람이 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 창업한 KSS해운의 발전은 어떠한가

외항 화물운송 시장의 안전성을 보고 KSS해운을 설립했습니다. 화물의 수요공급에 따른 기복이 심하지 않은 것은 물론 경기가 회복된다해도 3%정도 증가세를 보입니다. 지금도 5%미만의 증가에 그칠 것입니다. 이는 수요가 늘어도 공급하는 측면에서 전용부두 등 시설을 단기간에 늘릴수가 없어, 결국 수요증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선박의 공급이 시황을 좌우하기 때문에 항상 신조선박의 진입척수에 주의를 기우리는 경영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2017~2019년의 세계 가스해운업은 매우 어려울것으로 봅니다. 해운 조선업이 불경기 일수록 특수선이 시장에 많이 나옵니다.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장기 운송계약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감안하여 경영을 과학적이고 주도면밀한 판단에 근거를 두어 하는 것이지요. 해운조선 불경기 일때 가장 싼 금리로, 신조를 하는 것이 경영입니다.

그래서 KSS해운은 석유화학산업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엔 석유화학화물 운송비중이 80%, 가스수송 20%였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이 패턴이 바뀌어 LPG가스수송이 80, 석유화학 20의 비중으로 뒤바뀐 상황입니다. 이에 매출액은 늘었으나 안전 경영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국가 차원의 컨테이너운항정책 나와야 한다

전용선과 부정기선 등의 국적선박은 선주가 망하더라도 국내 은행권이 선박을 담보하고 있어, 국부 유출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컨테이너운항사업은 우리나라가 무역입국을 지향하고 수출입화물의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차원에서 볼때 외국선사에 최소한 경쟁이 되도록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중국의 차이나쉬핑 코스코와 구라파 MSC, CMA 등이 1만8000~2만 TEU급 풀컨선을 정부 자금 등을 이용해 싼 금리로 건조하여 운항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는 8000TEU급 선박이 운항하는데 그치고 있어 운항 경쟁에서 이길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경쟁이 불가능하면 우리나라 무역의 바게인 파워가 없어져 무역이 어려워 집니다.

해운을 위해서 국적 컨테이너 운항업체를 뒷바침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역을 성장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혁신적인 컨테이너운항 정책이 나와야, 외국 풀컨선사에 경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부의 조속한 컨테이너선사 발전대책을 기대합니다. 과거 해운산업합리화 정책에 의한 통폐합은 나쁜회사와 좋은사를 합친것으로, 해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은행을 위한 것이었으며, 특히 산업은행을 살리기위한 조치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통폐합은 산업은행 등이 채권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단행 된 것임으로, 무엇보다 대한선주가 한진해운에 인수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였다고 생각합니다. 트랜파부분은 몰라도 컨테이너분야는 국익 차원에서 통폐합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구책이 나와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대책이 없을 경우엔 중국 컨테이너선사 등을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우리나라 컨테이너선 운항사업 분야는 더욱 발전시켜야만 한다고 봅니다.

◇ 바른 경제 실현을 위한 이익공유제 무엇인가

최근들어 이익공유제(利益共有制)를 도입해야 한다고 각계에 주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보너스가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현재 회사 경영측과 노조와 밀고 당기면서 협의하여 흑자든, 적자든 상관없이 몇%를 정하여 상여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보너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에 법원에서도 보너스를 통상임금에 속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각 기업마다 8~10% 평균임금이 올랐던 것입니다.

이제는 올바른 경제를 실현키위해서라도 상여금 보너스제도를 제대로 시행해야만 합니다. 상여금을 바꾸어 말하면 회사 이익에 연동하여 지급하는 것으로, 이익배당금을 말하는 것입다.

따라서 회사 이익과 연동된 소득은 성과금이나 상여금이 아니라 주주에게 지급하는 것처럼 배당금으로 봐야 합니다. KSS해운은 작년에 주주의 권한으로 임총을 개최하여 17년동안 주주로서 배당금 받게 된 것이 고마워서라도 주주제안의 합의 따라 전종업원게 100%의 보너스를 시범적으로 지급토록 했습니다. 주주로서 배당금을 차질없이 받은데 따른 임직원들에 대해 진정한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직원은 입사 후 인생 60년을 회사에 투자한 보답으로, 성과급이 아닌 배당금의 의미로 보너스를 준 것입니다. 직원들의 노고를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사주조합에서는 6억원정도를 투자하게 돼 사주조합은 더 커지게 됐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익배당제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 직원은 만약에 회사가 적자가 나면 배당금을 안받는다는 동의를 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 이익공유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익공유제의 실상이 드디어 국내 기업 최초로 성사된 것입니다.

금융 자본주의가 너무 커져 돈 많은 사람만 잘 살고, 빈부의 격차만 심해지는 자본주의를 수정할 때가 됐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성과금 또는 상여금이 라는 말도 이익배당금으로 고쳐, 이익이 나면 당연히 임직원에게 배당을 주는 이익배당금제를 시행해 투명한 기업회계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 세계 해운업의 최대 현안은 선원수급이다
외 내항해운업은 자본 화물 선원의 3대 필수조건에 따라 과게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이를 바탕으로 경영되고 있습니만, 이중 감당키 어려운 부문이 적합한 수준의 선원수급에 있습니다. 90년대 초 3D현상 등의 여파로 급속하게 부원선원이 부족하게 될 것을 감안하여 외국인 선원을 도입키 위한 대책마련에 들어 갔습니다.

당시 1990년 해운항만청 시절에 외국인선원을 수입한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이 그간 외국에 나가 일하여 벌어들인 외화로 이렇게까지 발전했는데 오히려 외국인 선원이라 하더라도 수입한다는 정책 마련은 쉬운일 아니었습니다.그러나 부족한 부원 선원을 적정수준으로 승선시키지 못 할 경우엔 기존 승선 중인 사관마저도 하선하게 될 긴박한 상황에 이르러 있었기에, 당시 노조 측 김부웅 위원장과 대책을 마련하는데 분주했습니다.

각고의 노력끝에 해운항만청에서 제안한, 외국인선원고용지침이 마련돼 경제장관회의에 상정되게 됩니다. 부처별 사전협의에서 법무부의 반대가 가장 심했습니다. 이는 승선중 하선하여 국내 잠입할 경우, 찾을 방법 등 외국인 인력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는 점을 들어 반대한 것입니다.

이에 고용범위를 이탈 할 경우에는 당시에 거금인 200만원의 벌금을 해당 고용회사에서 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정부측에서 받아들여 선주협회와 선원노조연맹은 외항화물선 척당 갑판, 기관 부원 1명씩의 2명 선원에 한해 허용되는 외국인 선원고용 지침이 운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울러 ITF(세계운수노조연맹)가입에 따른 우리나라 외국인 선원 고용 비용을 해당선사가 지급토록하여 노사가 모두 발전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틀이 마련케 된 것이지요.

법무부는 끝내 반대를 포기하고 최종 외국인 선원 고용승인 지침을 시행토록 하여, 인력을 수출하는 국가에서 인력을 수입하는 국가로 변모하는 혁신적인 정책이 마련돼 현재에도 이 제도가 더욱 발전돼 시행되고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이 처럼 승선 선원수급 문제는 앞으로의 운항사업에 있어 큰 현안으로 등장하고 잇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 해운산업의 실태를 그대로 따라 가고 있어 더욱 중장기적인 선원수급 대책을 모색해 가야 할 것입니다.


◇18년전 창립한 바른경제동인회 회장직 수락하다

올들어 지난 3월 31일 바른경제동인회 정기총회겸 창립기념 행사에서 연로하신 조순 4대 회장님에 이어 5대 회장직을 수락(사진)했습니다. 이는 임직원의 이익배당제 등을 각 기업이 채택토록하기 위한 집념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올바른 경제 사회를 구성하겠다는 의지에서 회장직을 수락한 후 지난 7월22일 오후 2시30분 세종문회회관 별관 예인홀에서 각계 주요 인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이어 9월16일 하이얏트 호텔 조찬간담회에 이어 이날 오후 세종문회회관 별관 예인홀에서 세미나를 추가로 개최할 계획입니다. 더불어 10월28일과 11월25일 3~4차 세미나를 잇달아 개최하여 국내 기업의 임직원 이익공유제 확산에 주력할 방침이다.

◇ 그간 제주도에서의 생활과 건강은 어떠 하신지요

2005년 8월 일산 암센터에서 암 말기 상태에서 수술을 받은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수술 후 죽 먹는 단계를 지나 밥을 먹는데 가끔 고장이 나 병원에 가야함으로 병원 가까운데 있어야 했으나, 수술 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제주에 내려와 자연치유법으로 면역증강에 치중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매일 운동하고 온천욕으로 혈액순환을 돕고, 잠 잘자고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수술후 1년간 3개월에 한번식 다녔던 병원을 3년간 매년 6월단위로 다닌 후, 2009년 발병 4년만에 완치된 것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후 2011년 담당 의사의 권유로 검진을 받았으나 이상없다는 결과를 얻어, 현재는 서귀포 바이오토피아에서 즐거운 나날을 지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걱정해준 모든 분들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이기회를 통해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 한국해운의 歷史를 빛낸 참 경영인 박종규 회장은 누구인가

우리나라 70년대 초장기 외항해운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해양인들의 존경하는 인물로, 박종규(朴鐘圭 81 사진) 바른경제동인 회장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35년 서울태생인 그는 1955년 서울고를 졸업하고 6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기 전, 60년 12월 당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근무처로 외무부와 정부투자기업인 대한해운공사 밖에 없어,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면서 해운업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 국영기업체로는 유일했던 대한해운공사에서 기획파트의 가장 핵심 업무인 조선과장을 69년2월까지 맡아 오면서, 선박을 건조하는데 따른 막대한 자금조성에 역량을 쏟아, 한국해운 태동기에 10척의 신조선과 4척의 중고선을 확보한 인물이다.

어떤 배를 지을 것인가, 시장을 전망해야 했고, 물량에 따른 선종은 물론, 척수와 크기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7년의 시장을 꿰뚫어볼 줄 알아야 했다. 선박을 확보하는 것은 신조선의 경우, 당시엔 2-3년의 건조기간이 필요하여 7년 이후의 수송할 물량흐름을 파악해야 함으로 다양한 전략전술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는 64년도 이 맹기 당시 대한해운공사장에게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선박으로 컨테이너선을 강조했고, 이어 20만톤급이상의 유조선, 포항제철이 만들어 질 것에 대비하여 광탄선과 국민경제 실생활에 필요한 석유화학화물 운송선박인 캐미칼선 등의 건조선박 우선순위를 보고하여, 캐미칼선을 제외한 3가지의 선종을 신조 또는 중고선으로 선박확보를 착수할수 있는 실무적인 핵심 요원으로 일해 왔다.

한국 해운업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대한해운공사의 자사선 확보를, 최고경영자와 호흡을 같이하며 실무차원에서 거침없이 수행해 냈던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면서 69년 퇴사, 70년 캐미칼선박 운항을 전제로 하는 현재의 (주)KSS해운의 전신인 한국캐미칼해운을 설립하게 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특수선을 보유하고 있는 운항선사로 발전시키면서, 전 직원의 종업원지주제를 창립, 유한양행과 대한해운에 이어 3번째로 나눔의 경영을 성사시킨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또 국내 해운경영인 가운데 첫 번째로 북한을 방문, 부산과 나진항을 잇는 컨테이너항로를 개설했고, 이에 앞서 선주협회의 해무담당부회장으로 해운산업통폐합, 노사간 협력체제 정착 등에 이어 중국 연길시에 조선족선원양성학교를 설립, 부족한 부원 선원을 해결하는데도 앞장섰다.

그후 1995년 3월 경영의 지휘봉을 25년 만에 전문경영인에게 넘겨주고, 회장직으로 물러나면서도 모든 경영권을 후임 사장에게 일임하고 보다 적극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기업의 국가적 소임과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경제인들이 공유하자는 취지의 바른경제동인회를 동료기업인 100여명과 함께 1993년에 설립, 97년까지 이사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경실련 중앙위원회 의장직도 맡아 시민운동에 대한 지원과 직접 간여했다.
 
때문에, 6공시절엔 좌파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고, DJ정부가 들어선 뒤 시민운동이 정권의 들러리처럼 기울기 시작함에 이르러 시민운동에 일획을 긋는다. 96년부터 2년 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위원을 지내면서 노사산업평화 구축에 남다른 애정과 정열을 쏟아 왔으나, 결국은 노사문제에 정부가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에 의해 '노사정위원회를 해체하자'는 주장을 펴, 위원회를 떠나게 된다.
 
97년 KT&G 비상임 이사와 행정개혁시민연합회 공동대표를 2004년, 2001년까지 각각 맡아 온데 이어 98년엔 해양수산부 행정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해양수산부 규제개혁에 앞장섰다. 그가 해양수산부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으니 그 해양수산부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에서 위원장 직을 수행케 된 것이다. 또 2002년엔 투명성 포럼 공동대표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장직을 역임하고, 특히 2003년 해사재단이사장을 맡아 온데 이어 또다시 2004년 3월엔 대통령산하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2년간 국가발전의 걸림돌의 각종 규제를 대거 해소하는데 큰 역할을 한바 있다.

또 2006년 3월까지 2년간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수행하면서 32회의 위원회 개최를 통해, 매년 1000여건의 규제를 심사하여 그 중 30% 290여건에 대해 철회 또는 개선을 권고하는 등 규제의 품질 제고에 주력하는 열의를 보여, 그해 8월 규제개혁유공자 포상식에서 영예의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해양수산부를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10여 년간 한국선주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오늘의 한국해운을 발전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의 해운 발전을 위한 화려한 인생여정에에 따라 92년 16회해운의 날 은탑산업훈장과 94년 제4회 산업부문 일가상에이어 95년 제4회 산업부문 좋은 한국인상을 수상한데 이어, 올들어서는 지난 5월 한국 기업인 창업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원칙과 정도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이면서 합리주의자다. 그리고 한국 해운의 역사를 빛낸 참 해운경영인으로, 해양강국을 향한 모든 관계인들로 부터 존경받는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정리=정웅묵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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