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세창 제언: 키코 사건이 남긴 것들안녕하세요. 법무법인 세창의 이연주 변호사입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환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자, 중소기업들의 상당수는 추후 환율하락에 대비하고자 금융상품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도래하면서 환율은 1달러 당 900원 대에서 1,500원대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키코에 가입한 기업들은 은행들의 콜옵션 행사로 약3조5천억원에 이르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키코분쟁은 피해를 입은 기업들과 은행간에 법정분쟁으로 이어졌고 여러 하급심에서는 기업들과 은행들간에 승패가 엇갈리는 판결들이 이어졌습니다. 대법원은 상고심에 계류중인 관련 사건 가운데 4건을 선정하여 전원합의체에 회부하였고, 공개변론을 거친 다음 대법원 2013. 9. 26. 선고2012다1146호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위 판결은 그 동안 피해기업과 은행 간의 지리한 법적 공방을 일단락짓고 하급심에서의 판단 기준이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키코상품은 선물환계약의 거래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Knock-in 조건과 Knock-out 조건이 가미된 변형선물환의 일종인데,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기업들에게 제시하
2013 분야별 10大 뉴스 2013 송년특집 ⑨ 해사칼럼 10大 뉴스 ①해사시론=우리나라 최초 상장회사였던 대한선주를 아는가요 ②특집②작지만 강한 해양수산부를 기대한다 ③특집④사설=금수강산(錦水江山)에 해양레저산업을 조성하자 ④創刊 7주년특집:②부활된 해양수산부에 바란다 ⑤2013夏季특집=부산 광양항에 세계 최대 컨선 입항 현장을 가다 ⑥사설:韓中日 국제물류공사의 설립이 필요하다 ⑦사설:韓電 국내 대형화주 귀감(龜鑑) 되다 ⑧사설:국적 외항해운업체 다운 외항선사는 무엇인가 ⑨사설:해운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 ⑩사설:해양수산부 라는 명칭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⑦한국해운歷史 빛낸 참 경영인 박종규 누구인가 생존해 있는 해운경영인 가운데 외항해운업 70년대 초장기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해양인들의 존경인물로 박종규(朴鐘圭 78 사진) 전 행정규제개혁위원장 겸 전 KSS해운 회장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35년 서울태생인 그는 1955년 서울고를 졸업하고 6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기 전, 60년 12월 당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근무처로 외무부와 정부투자기업인 대한해운공사 밖에 없어,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면서 해운업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 국영기업체로는 유일했던 대한해운공사에서 기획파트의 가장 핵심 업무인 조선과장을 69년2월까지 맡아 오면서, 선박을 건조하는데 따른 막대한 자금조성에 역량을 쏟아, 한국해운 태동기에 10척의 신조선과 4척의 중고선을 확보한 인물이다. 어떤 배를 지을 것인가! 시장을 전망해야 했고, 물량에 따른 선종은 물론, 척수와 크기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7년의 시장을 꿰뚫어볼 줄 알아야 했다. 선박을 확보하는 것은 신조선의 경우, 당시엔 2-3년의 건조기간이 필요하여 7년 이후의 수송할 물량흐름을 파악해야 함으로 다양한 전략전술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企劃特輯=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⑤ 한국선주협회 산증인 故 이맹기 회장 누구인가 故 이맹기 회장(사진)은 47년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바다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5ㆍ16 군사쿠데타 후 62년 해군참모총장 겸 국가재건 최고회의 최고위원으로 재직하다 64년 예편해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외항 해운업 경영에 뛰어 들었다. 이후 해운공사가 대한선주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민영화됨에 따라 68년 해운입국의 기치 아래 대한해운을 창립, 76년 포항제철과 철광석 및 원료탄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업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그래서인지 2004년 작고한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을 박태준 포철 전회장이 두살 많아 "맹기형"으로 불렀다. 지난 2008년 12월 1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대한해운 창립 40주년 기념사 도중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2004년 작고한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을 이같이 호칭하여 이날 참석한 많은 이들로 부터 호응을 얻었다. 고 이회장(사진:2002년도 고 인의 모습)과 박 회장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도 함께 일했으나 이후엔 정치가 아닌 경제분야로 눈을 돌려 제철보국과 해운입국의 정신으로 철강업과
법무법인 세창 제언:임차기간 중 발생한 장소적 이익은 누구의 것안녕하세요. 법무법인 세창의 안영환 변호사입니다.얼마 전에 약국을 하는 지인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하소연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지인은 군 지역에 소재한 병원 맞은 편에 보증금과 월세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건물을 빌려 약국을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찾아 오는 고객이 많지 않아 월세 내기에 급급했다. 지인은 한 명 한 명 고객이 올 때마다 혼신의 힘으로 고객을 대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약국은 잘 운영되었다. 2년이 지나 임대차기간이 종료할 때 즈음 건물주인은 월세를 올려 달라고 하였고, 지인은 월세를 올려주었다. 그 후에도 갱신할 때 마다 건물주인이 월세인상을 요구하여 월세를 올려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8년 정도 약국을 운영하다 보니 임대료는 처음보다 2배 정도 되었다. 그 동안 바람에 출입문이 훼손되어도 지인이 직접 수리하는 등 자질구레한 수리는 지인이 하였다. 그런데, 올해 초 건물주인이 건물을 비우라고 하였다. 지인은 임대료를 올려 줄 테니 약국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자신이 해장국가게를 할 것이니 무조건 건물을 비울 것을 요구하며 명도소송을 제기하였다. 지인은
企劃特輯=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④ 故 이맹기 회장과 대한민국 해양연맹의 출범 특이한 사실은 故 이맹기 회장이 1996년 해양수산부의 출범과 맥을 같이해 일반 국민들로부터 해양사상을 확산시켜 바다로의 진출등 해양강국 실현에 꿈을 두고 해양수산부의 발전을 위한 차원에서 그 이듬해인 1997년 대한민국 해양연맹을 설립하게 된다.(사진: 한국선주협회장 시절의 고 이맹기 회장이 당시 필자가 주최한 해사행정일원화 좌담회에서 열정을 갖고 마하는 모습) 고인은 이러한 뜻을 필자에게 강력하게 전달하고 미국의 해양연맹처럼, 우리나라에도 해양연맹을 설립해 범국민 단체로의 활동을 유도하여 해양강국을 앞당겨 실현토록하자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그러한 뜻을 받는 필자로서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무엇보다 발기인 선임 등 모든 법인의 설립 일체 등의 과정을 당시 초대 사무총장으로 일하게 될 민병섭 제독과 협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고심끝에 해운 수산 양업계 7명의 유력인사를 선발하고, 해군 출신의 주요인사와 해양관료 출신등 3개부분의 인사들을 집대성하고 그들에 의해 발기인을 구성하게 됐다. 이 회장은 이들 발기인 선임을 대단히 흡족해 하면서 이들과 월1회정도의 모임을 갖도록 하자
企劃特輯=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③1935년 전남 강진 출신인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사진 좌측)과 박종규 전 KSS회장(사진 우측)은 수산, 해운업계의 핵심 지도급 인사로 1986년 당시 해사행정일원화 작업 초기부터 줄곧 깊은 관심을 갖고 해양행정의 올바른 집행을 바라왔던 경영인이 었다. 부산수산대학 출신인 김재철 회장은 정부의 장보고기념사업회 설립에 따른 초대 회장으로 장보고의 역사 규명과 바다로의 진출에 대한 젊은 인력 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지금도 수산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각고끝에 올해 재출범한 해양수산부의 첫 차관에 손재학 국립수산과학원장을 적극 추천했다는 뒷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박종규 회장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대한해운공사를 거쳐 고 이맹기 회장과 퇴사하여 장두찬 전 선주협회장과 함께 KSS해운의 전신인 한국특수선을 설립,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한국 외항해운의 각종 현안을 선두에 서서 해결해 온 인물이다. 고 이맹기 회장과는 대한해운공사 시절때 부터 각별한 관계로 인연을 맺고 선주협회장을 가장 오래 역임하는 동안 해무담당 부회장으로 활약해 각종 현안을 슬기롭게 풀어 냈던 장본인이다. 이에 중국 연길시에 중국 조선족 젊은
企劃特輯=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② 故 지철근 회장(하단 사진:필자가 주최한 해사행정 일원화 관련 특별좌담회에 참석 당시의 고인의 모습)은 해무청 당시 수산국장을 지낸 후 퇴임하여 본인의 아호를 딴 월해재단을 설립해 후배 수산인 양성에 평생을 쏟아온 인물이다. 잠시 수산업에 참여했으나 그 사업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하다가 결국은 정리를하고 돈암동 사저 건물에 월해 재단을 운영하면서 매년 학자들에게 우수논문상을 수여하는 등 후진 양성은 물론 누구보다 해사행정 일원화를 해무청 당시에 체험했던 공직자 출신이었기에 여러차례 좌담회 등에 참석해 그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했던 바 있다. 전형적인 정부 수립당시의 고위 공무원이었기에 본연의 선비자세를 견지해 왔던 그는 한일어업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승만대통령의 평화선 정책을 주도해 입안하고 그 정책을 추진했던 담당 국장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평화선이라는 정책을 마련하여 한일간 어업분쟁을 가장 국익에 우선을 두어 정책을 전개했기에 현재도 한국수산업의 대부로 불리기에 충분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한 그가 못내 아쉬워햇던 현안이 바로 여러 부처로 분산된 해양분야의 행정 집행이 였기에 해사행정 일원화에 대해서
企劃特輯=해양수산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① 해사행정 일원화로 통칭된 당초 해양수산부는 여러부처로 분산된 바다관련 행정을 한곳으로 모아 하나의 부처로 출범시킴으로써 해양강국을 앞당겨 시현하자는 뜻에서 비롯됐다. 과거 해무청 당시, 사실상 해양관련 행정이 하나로 모아져 해무청이라는 부처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의해 운영된 점을 고려한다면 바다행정의 일원화는 정부수립과 더불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이 잇달아 탄생되면서 바다관련 행정부처는 여러곳에 흩어져 분산돼 교통부 농림부 산하에 의해 운영돼 온 형상으로 발전하는데 그쳤다. 이러한 현안을 감지해 온 선각자들은 해양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에 한계를 느끼게 돼 제대로 된 해사행정 일원화를 구축해야한다는데 뜻을 모아 왔다. 이에 따라 작고한 지철권 전 해무청 수산국장(사진:좌측 2번째), 이맹기 전 대한해운회장(좌측 첫번째)등과 정연세 전 해운항만청장(좌측에서 3번째), 박종규 전 KSS해운 회장(우측에서 첫번째),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등이 해운 수산업계 대표로 앞장서서 이러한 뜻에 의지를 담아 신중하게 추진하면서, 해사언론인의 동조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한화갑 전 국회
사설:해양수산부 라는명칭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해양수산부라는 명칭이 어떻게 만들어져 붙여 졌을까. 해양은 넓고 큰 바다라는 뜻으로 바다 관련된 모든 분야의 내용을 이 한 단어로 압축하여 표현하여 사용되고 있는 단어 이기도 하다. 해양이라는 단어엔 이에 따라 수산도 당연하게 포함돼 있다. 수산업 뿐만아니라 해운업과 조선업 등이 이 단어에 포함돼 해양업으로 통칭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해양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해양관련 부처 이름이 해양수산부로 현재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각있는 인사들은 지금도 해양수산부라는 명칭보다는 해양산업부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과거 김영삼 정권 당시, 창설될 시기에 수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지도급 인사들은 해양관련 부처 명칭에 대해 상당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해운항만청 수산청 해양경찰청 등 3개 외청과 8개여 부처에 산재돼 있던 해양관련 행정 업무를 가져와 한 부처에 통합시켜 창설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을 앞세워야 하기에 수산이라는 단어을 명칭에 삽입해야 한다는 데서 비롯됐다. 따라서 1차사업인 수산과 3차산업으로 분류되는 해운업 등을 관장했던 수산청과 해운항만청 등의 통합과정 세 불리기에서 비롯돼 결